
극단적 선택.
우리는 오랫동안 한 사람의 죽음을 이렇게 불러왔다.
선택. 이 두 글자 안에는 이미 판단이 들어 있다. 결정한 사람이 있다는 뜻이고, 그렇다면 책임도 그에게 있다는 뜻이 된다. "남은 사람들 생각은 안 했느냐", "이기적이다"라는 말이 그 뒤에 따라 나오는 건 우연이 아니다.
그래도 결국 본인이 한 일 아니냐고 물을 수 있다. 맞다. 마지막 순간에 움직인 건 그 사람이다. 다만 나는 다른 쪽이 궁금하다. 그가 거기까지 가는 동안 붙잡을 수 있었던 손은 정말 하나도 없었는가.
정말 '선택'이라면 설명되지 않는 일이 있다. 맹독성 제초제 파라콰트의 판매가 2012년 금지됐다. 그 뒤 농약 자살 사망률은 인구 10만 명당 5.26명에서 2.67명으로 절반 아래까지 떨어졌다. 2011년부터 2013년 사이 줄어든 전체 자살의 56%가 이 농약 자살 감소분이었다는 게 고려대 이원진 교수팀의 분석이다. 마음을 고쳐먹게 한 게 아니다. 손 닿는 곳에서 치웠을 뿐이다. 이성적인 결정이었다면 다른 길을 찾았어야 한다. 그러지 않았다. 우리가 '결정'이라 불러온 것의 실체는 대개 몇 시간짜리 소용돌이였다.
그 소용돌이에 우리는 2024년 한 해 1만 4,872명을 잃었다. 하루 마흔 명꼴이다.
내 직업이 이 이야기를 남의 일로 두지 못하게 한다. 수의사는 자살률이 높은 직업이다. 동료를 자살로 잃어 본 적이 있다고 답한 호주 수의사가 열에 일곱 가까이 된다는 조사도 있다. 우리가 유난히 나약해서가 아니다. 안락사에 따르는 죄책감, 돈만 밝힌다는 시선, 갚아야 할 대출. 조건이 그렇게 깔려 있다.
나도 그 조건 위에 서 있었다. 마흔 무렵 번아웃이 반복됐고 나중엔 우울감까지 왔다. 그때 병원에 가지 않았다. 의지가 없어서가 아니었다. 나 말고는 동물병원에 수의사가 없었다. 자리를 비울 수가 없었다.
그 시절을 내 성격 탓으로 여겼다. 완벽주의에 갇힌 대가라고. 그것도 하나의 이름이었다. 잘못된 이름은 그래서 무섭다. 붙는 순간 당사자가 가장 먼저 그것을 믿어 버린다.
2024년 가을, 나는 'MINDSOS 마음구조챌린지'의 마음구조대원으로 선발됐다. 그날 블로그에 이렇게 적었다. "한 사람이라도 자살을 막기 위해 미약하나마 제 힘을 보태겠습니다." 그 한 사람을 지키는 일은 어쩌면 말에서 시작된다.
다행히 언어는 바뀌고 있다. 「자살예방 보도준칙 4.0」은 이렇게 못 박았다. "자살은 결코 '선택'일 수 없습니다." 대신 '사망하다', '숨지다'를 쓰라고 적었다. 판단을 빼면 그 자리에 질문이 들어선다. 왜 거기까지 갔는가.
예일대 정신의학과 나종호 교수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자살이 극단적 선택이 아니라는 주장도, 궁극적으로는 이를 개인의 선택이나 의지의 문제로 보기보다는 '사회적 책임이 있는 죽음'으로 봐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였어요."
이름을 바꾸면 문장의 주어가 고인에게서 우리에게로 옮겨 온다. 물론 남겨진 이들을 탓하자는 말이 아니다. 그들은 이미 자기 몫보다 무거운 자책을 지고 산다.
오늘 할 수 있는 일은 두 가지다. 부고 앞에서 "왜 그랬대?"라고 묻지 않는 것. 그리고 그 죽음을 '극단적 선택'이라 부르지 않는 것.
자살은 이기적인 결정이 아니다. 오히려 그 죽음을 '선택'이라 불러 책임을 고인에게 넘길 때 마음이 편해지는 쪽은 누구였을까.
[박근필]
그로쓰 퍼실리테이터
읽고 쓰고 말하는 삶으로 당신의 성장을 돕습니다
박근필성장연구소장, 수의사,
칼럼니스트, 커리어 스토리텔러
저서; <마흔 더 늦기 전에 생각의 틀을 리셋하라>
독저팅, 필북, 필레터, 필라이프 코칭 운영
부산 시청 특강 외 다수 출강
이메일 : tothemoon_park@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