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에서 인구 대비 문인의 수가 가장 많은 나라가 대한민국이 아닐까? 추측한다. 그만큼 정신문화의 가치를 존중한다는 점에서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문학작품 창작을 취미활동으로 하는 사람이 많아진다는 것은 바람직하다.
그러나 문학 하는 행위를 함으로써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이나 명리적 가치 실현, 돈벌이 수단으로 문인의 가면을 쓰고 있는 사람이 많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는 문학의 본질과는 거리가 먼 문학의 위상을 추락시키고 문인에 대한 존경심을 송두리째 앗아갈 개연성이 크다.
문학의 발전 과정을 보면 제정일치 시대 춤과 주술적인 노래가 결합한 종합예술의 형태에서 시작하여 차차 춤과 노래로 분리되었다. 하층민들은 일하면서 노동의 고달픔을 잊기 위해 구전으로 전해오는 노동요 형태로, 궁중에서 볼거리를 제공하는 종합예술로, 양반들의 풍류놀이로 노래로 불린 가사나 판소리의 형태로 구술되다가 근대에 이르러 시조창, 창가, 신체시, 그리고 현대에 이르러서 서양의 신문화가 들어오면서부터 시와 소설의 형태로 발전해 왔다.
근대 이전 시와 현대 시의 분수령은 정형률에 의한 음악과 결합한 형태에서 글자 수의 얽매임이 없이 자유롭게 이미지를 위주로 하는 그림과 시가 결합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 서양의 수 세기 동안 걸쳐서 현대 시가 변해온 문예사조를 짧은 기간에 실험하고 받아들였다. 소설 또한 신파조의 신소설에서 다양한 문예사조를 실험하면서 오늘날의 현대소설로 발전해 왔다. 즉 일제강점기 초기에는 계몽주의 문학이 성행했고, 1910년대 말부터 1920년대 초까지는 상징주의·낭만주의·사실주의·자연주의 문학을 실험하면서 1930년대에 와서는 『시문학』지를 중심으로 한 순수시 운동과 모더니즘 문학으로 현대 시다운 모습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문학사를 모르고 시를 창작한다는 것은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식의 창작은 자칫 낙서행위로 전락할 우려를 안고 있다. 대부분 시인이 시 공부를 하지 않고 무턱대고 시를 써 문학 활동을 하는 문인들은 자신의 주관적인 생각을 기술한 것이 시라고 여기고 사물에 많은 의미 부여 혼자하고 자신만이 알고 있는 생각들을 이미지로 알고 기술한다. 주로 시인들은 정서를 표현하는 서정시나 사물을 관찰하고 인간의 삶과 비유하여 시적 체험을 이미지로 형상화하여 표현하는 사물시를 쓰게 된다.
그러니까 시적 정서 체험이 재료이고 이 재료를 형상화하는 과정으로 요리하여 적절한 시어를 선택하고 배열하여 시를 완성하게 된다. 그러나 시 공부와 습작 과정을 거치지 않고 문학잡지의 추천으로 시인이 된 사람은 시의 기본적인 원리를 모르고 그저 자기 생각을 쓰면 시가 되는 걸로 안다. 시적인 정서로는 기쁨. 슬픔, 분노, 고독, 불안, 공포, 허무, 절망, 시기 질투 등이 있다. 서정시는 이런 정서 상황을 경험한 것을 사물을 통해 빗대어 형상화 과정을 통해 구체화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여러 정서 중 하나를 중점으로 선택하여 이미지로 그림을 그리듯이 묘사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기초적인 지식이 없이 무턱대고 어떤 사물을 대상으로 자신의 정서 체험을 진술하게 되면 한가지 정서가 주가 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정서가 복합적으로 기술되게 된다. 이런 시는 형상화 과정을 거치지 않는 그야말로 주관에 치우친 즉흥적인 시다. 이런 시는 공감이 되지 않는다. 시인의 시적 정서 체험과 똑같이 독자도 느껴질 수 없으므로 혼자만의 넋두리가 되어버린다.
엘리엇은 객관적 상관물로 대체하여 독자도 시인이 표현하고자 하는 시적 정서 체험을 독자에게 그림을 그리듯이 이미지로 형상화하여 똑같이 정서 경험을 환기해야 공감한다는 견해를 펼쳐왔다. 본래 시가 주관적인 정서를 표현하기는 하지만, 얼마나 객관적으로 정서를 표현했느냐에 따라 독자에게 공감을 주느냐 못 주느냐가 달린 것이다.
예를 들어 “산 벚꽃”이 피어있는 광경을 보고 “허무”의 정서 경험을 형상화하여 표현한다고 했을 때, 산 벚꽃과 인간 사이의 허무한 경험 상황을 떠올려 이 상황을 시인이 연극 연출자가 되어서 객관적으로 묘사하고 진술해야 한다. 예를 들면, “산 벚꽃/구경꾼들/날마다 와글와글//오메!/점점 커지는 눈동자/딱 벌어지는 입//보고 또 보고/찰칵찰칵//봄바람/꽃잎 모두/떨구어냈다//공연 끝난/무대/발길 끊겼다//” 김관식의 「산 벚꽃」처럼 허무의 정서 체험을 이미지로 그려놓으면 한 편의 시가 되는 것이다.
시는 언어를 압축하고 관념어나 추상어, 되도록 한자어를 쓰지 말고, 우리말로 쉽게 표현해야 정서가 환기된다는 것이다. 이때 객관적 상관물은 ‘산 벚꽃’ 되는 것이고, 허무의 정서를 산 벚꽃이 모두 떨어져 사람들이 발길을 끊었을 때 허무한 정서가 독자에게 환기되면 되는 한 편의 시가 완성되는 것이다.
이처럼 한가지 정서에 집중하여 정서 경험 상황을 형상화하여 적절한 시어를 사용하여 묘사와 진술로 표현하면 시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머리를 쥐어 짜내며 머릿속에 그려진 그림을 이미지로 착각하여 그것을 설명하려고 들면 주관적인 생각에 치우쳐서 아무도 공감이 안 가는 혼자만의 넋두리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런 기초적인 시의 원리를 모르고 무턱대고 자신의 주관적인 생각과 느낌을 기술한 것을 시라고 한다면, 다른 사람이 무슨 상황인지 어떤 정서를 표현하려는 것인지 알 수 없게 된다. 시의 원리를 깨치지 못하고 시를 쓴다고 맹목적으로 매달린다고 해서 좋은 시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수준의 시만 나오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수년이 지나도 그대로일 수밖에 없다.
시의 원리를 모르고 시를 아는 것처럼 남을 속인다고 해서 이미 이 단계를 뛰어넘은 시인이 볼 때 그 사람의 허세를 보고 혼자 비웃고 말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진실을 외면한 채 겉치레를 위해 문학단체의 높은 감투를 차지하면 자신이 시를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이 숨겨질 줄 착각한다. 문학은 진실이다. 그런데 이런 위선으로 문학을 하는 사람이 너무도 많다. 시적 수준이 극히 미약한 시들을 시집으로 엮어 시집을 나누어준다고 해서 그 시인이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위선적인 사람이라고 자기 스스로 자인하고 자기 탐욕을 보여줄 뿐이다.
문인들이 보내온 시집을 받고 주위 사람들은 고맙다는 겉치레 인사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우둔한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시적 정서를 객관적으로 표현한 수준은 시는 시를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도 당연히 공감한다. 문단의 경륜을 내세워 자신의 시를 강요하지 말라. 시 공부를 하지 않는 사람이 대충 시를 써서 문집을 수십 권을 발간한다고 해서 문학 경륜이 쌓이는 것은 아니다. 그런 엉터리 시로 문학상을 받았다고 자랑한들 누가 인정해 주겠는가? 명리적 가치만 좇아가는 공허한 내면 의식만 노출하는 어리석은 짓일 것이다.
시를 보는 안목이 생기지 않고서는 절대로 남에게 공감하는 좋은 시를 창작할 수 없다. 꾸준히 시적 안목을 기르기 위해 문학사에 검증된 시를 많이 읽고 혼자 시 창작론을 공부하며, 독창적인 시론을 터득하고 실제로 적용할 수 있을 때까지 꾸준히 습작한다면, 누구나 떳떳한 시인으로 거듭날 수 있다.
문인들의 시집 증정 문화는 세상을 따뜻하게 하는 나눔의 문화이다. 자신의 내면을 공개하는 시집을 엉터리의 시집으로 수십 권을 묶어 증정한다고 해서 자신이 유명해지리라는 착각을 해서는 안된다. 조급하지 말고 조금 늦었다고 생각이 들더라도 다시 시작하라. 혼자만의 내면 거울을 들여다보듯이 진지하게 시를 창작할 때 좋은 시는 탄생될 것이다. 그런 정성을 들인 시를 엮은 시집을 남들에게 기증할 때 냄비 받침으로 대접을 받는 일이 없어질 것이다.
[김관식]
시인
노산문학상 수상
백교문학상 대상 수상
김우종문학상 수상
황조근정 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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