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를 생각하고 계십니까?”
협상 테이블에서 이 질문이 나오면 순간적으로 긴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가격을 먼저 말해야 할지, 상대의 제안을 기다려야 할지 고민하기 때문이다. 협상에서 처음 등장하는 숫자는 단순한 숫자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이후 협상의 출발점이자 판단 기준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행동경제학에서는 처음 접한 숫자나 정보가 이후 판단에 영향을 주는 현상을 ‘앵커링 효과(Anchoring Effect)’라고 부른다. 배가 닻(anchor)을 내리면 그 주변에서 움직이는 것처럼 사람의 판단도 처음 제시된 기준점 주변에서 이뤄질 수 있다는 의미다.
비즈니스 협상에서도 이러한 현상은 쉽게 발견된다.
예를 들어 한 업체가 제품 공급가격으로 1,000만원을 먼저 제시했다고 가정해보자. 구매자는 가격이 높다고 생각하면서도 “900만원 정도면 어떻습니까?”라고 대응할 수 있다. 처음 제시된 1,000만원이 협상의 기준점 역할을 한 것이다.
반대로 구매자가 먼저 “우리 예산은 700만원입니다”라고 말했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 판매자는 자신의 희망가격을 그대로 주장하기보다 700만원이라는 숫자를 의식하면서 협상을 시작할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협상에서는 ‘누가 먼저 숫자를 말하는가’가 중요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오해해서는 안 된다. 무조건 먼저 높은 가격을 부르면 유리하다는 뜻은 아니다.
시장가격이 1,000만원 수준인 제품을 아무런 근거 없이 2,000만원이라고 제시한다면 상대가 그 숫자를 기준으로 협상하기보다 거래 자체를 포기할 수도 있다. 지나치게 비현실적인 첫 제안은 협상력을 높이기는커녕 신뢰를 떨어뜨릴 수 있다.
강한 첫 제안에는 근거가 필요하다.
제품의 원가와 품질, 시장가격, 경쟁제품, 서비스 수준, 계약기간 등 상대가 이해할 수 있는 이유를 함께 제시해야 한다. “1,000만원입니다”라고 말하는 것보다 “제품 가격과 설치, 2년간 사후관리까지 포함한 조건으로 1,000만원을 제안드립니다”라고 설명하는 것이 설득력을 높인다.
연봉협상에서도 앵커링은 나타날 수 있다.
회사가 먼저 “연봉 5,000만원을 생각하고 있습니다”라고 제안하면 이후 대화가 5,000만원을 중심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있다. 지원자가 5,500만원을 희망했더라도 회사가 제시한 숫자를 기준으로 조금 올리는 방식으로 협상할 수 있다.
반대로 지원자가 자신의 경력과 직무 수준, 성과 등을 근거로 희망 범위를 먼저 제시한다면 다른 출발점에서 대화가 시작될 수 있다. 이때도 중요한 것은 단순히 높은 금액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왜 그 정도의 보상이 적절한지 설명하는 것이다.
부동산 가격협상도 이해하기 쉬운 사례다.
매도자가 5억원을 희망하는 주택에 5억5,000만원의 가격을 제시했다고 가정해보자. 매수자는 가격을 낮추려고 하면서도 처음 제시된 5억5,000만원을 의식할 수 있다. 그러나 주변의 비슷한 주택이 4억8,000만원 수준에서 거래되고 있다는 자료를 알고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5억5,000만원은 너무 비쌉니다”라고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유사한 조건의 거래가격과 주택 상태 등을 근거로 자신의 기준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상대의 앵커에 끌려가지 않는 방법이다.
협상에서 상대가 강한 첫 숫자를 제시했다고 해서 반드시 그 주변에서 흥정할 필요는 없다. 먼저 “그 가격은 어떤 기준으로 산정됐습니까?”라고 질문해볼 수 있다. 상대의 근거가 충분하지 않다면 시장가격이나 원가, 성과자료 등 새로운 기준을 제시해 협상의 출발점을 다시 설정할 수 있다.
특히 처음 들은 숫자가 지나치게 높거나 낮다고 생각된다면 즉시 가격 흥정에 들어가기보다 잠시 멈추는 것이 필요하다. 상대의 숫자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그 기준 안에서 생각하기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좋은 협상가는 숫자를 말하기 전에 준비한다. 시장가격은 얼마인지, 내가 원하는 조건은 무엇인지, 어디까지 조정할 수 있는지 미리 정해둔다. 자신의 기준이 없으면 상대가 던진 첫 숫자가 곧 나의 기준이 되기 쉽다.
앵커링의 핵심은 상대를 속여 높은 가격을 받아내는 기술이 아니다. 협상에서 처음 등장하는 정보가 판단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합리적인 기준을 세우는 데 있다.
결국 협상에서 중요한 것은 ‘첫 숫자’와 ‘근거’다. 먼저 제안할 상황이라면 현실적이고 설명 가능한 기준을 제시해야 하고, 상대가 먼저 제안했다면 그 숫자가 타당한지 검토해야 한다.
협상에서 첫 숫자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이후 대화가 움직이는 기준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협상을 움직이는 진짜 힘은 무조건 높은 첫 제안이 아니라 그 숫자를 뒷받침하는 합리적인 근거에서 나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