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번 글에서는 『증병조참판정공전』의 저자, 저술 배경, 사료적 가치 등을 소개하였다. 이번 글에서는 『증병조참판정공전』과 충무공 이순신의 장계 「옥포파왜병장」 두 기록을 비교하면서 조선 수군의 제1차 출전 시기에 벌어진 옥포해전·적진포해전의 전투 경과를 살펴본다.
조선 수군의 제1차 출전 시기에는 순서대로 옥포해전, 합포해전, 적진포해전 총 3번의 전투가 벌어졌다. 『증병조참판정공전』의 합포해전 기록은 안방준의 「부산기사」에도 거의 그대로 실려 있으며, 합포해전이 벌어진 위치를 파악하기 위한 목적으로 「부산기사」의 해당 기록을 고찰한 연구 자료가 이미 여럿 출간되었다. 그러므로 이번 글에서는 합포해전에 관해 살펴보지 않는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좌수사 이순신 휘하 전라좌수영 수군은 1592년 5월 4일 제1차 출전을 개시하였다. 5월 6일 전라좌수영 수군은 당포에서 경상우수영 수군과 합세하였다. 그 다음날인 5월 7일에는 옥포해전과 합포해전을 치렀으며, 5월 8일에는 적진포해전을 치렀다. 이들 3번의 전투 경과는 충무공의 장계 「옥포파왜병장」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1) 옥포해전 직전 조선 수군의 이동 경로
임진왜란 시기 조선 수군의 첫 전투는 옥포해전이다. 옥포해전이 벌어진 옥포는 지금의 거제시 옥포동에 해당한다. 현재 역사학계는 옥포해전이 벌어지기 직전 조선 수군의 이동 경로에 관해 2가지 설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는 조선 수군이 거제도 남쪽 바다를 거쳐 옥포로 이동했다고 보는 소위 ‘남로설’이고, 둘째는 조선 수군이 고성과 거제 사이 해협인 견내량을 지나 거제도 북쪽 바다를 거쳐 옥포로 이동했다고 보는 ‘북로설’이다. 「옥포파왜병장」과 『증병조참판정공전』에 나타난 옥포해전 직전 기록을 자세히 살펴보자.
「옥포파왜병장」
(5월) 7일 꼭두새벽 한꺼번에 배를 출발하여 적선들이 정박해 있는 천성, 가덕을 향해 가다가 오시경(11~1시) 옥포 앞바다에 이르러 척후장 사도첨사 김완, 여도권관 김인영 등이 신기전을 쏘아 변보를 알리므로 적선이 있음을 알고 다시 여러 장수에게 함부로 움직이지 말고 산처럼 신중하도록 엄히 전령한 뒤 《후략》
『증병조참판정공전』
(5월) 8일 지세포를 지나 조라포에 이르자 정찰선이 휘와 황기를 흔들며 동쪽에서 달려오는 것이 멀리서 보였다. 수사(전라좌수사)가 적이 반드시 옥포 부근에 있으리라 여기고 곧바로 초요기를 상선의 뱃머리에 세우니 여러 장수가 모두 와서 명을 들었다.
「옥포파왜병장」은 옥포해전이 벌어진 날짜를 5월 7일로 기록하였으며, 『증병조참판정공전』은 5월 8일로 기록하였다. 비록 후자는 그 날짜를 하루 다르게 서술한 오류가 있지만, 조선 수군의 이동 경로에 있던 지명 두 곳을 명시하였다.
『증병조참판정공전』은 옥포해전 직전 조선 수군이 지세포와 조라포를 지났다고 서술하였다. 조라포는 지금의 경남 거제시 일운면 구조라리에 있었고 지세포는 지금의 경남 거제시 일운면 지세포리에 있었으며, 두 곳 모두 경상우수영 소속 진포(鎭浦)였다. 『증병조참판정공전』은 비록 조선 수군이 지세포와 조라포를 지나간 순서를 이동 경로와 반대되는 방향으로 서술하였지만, 여기에 명시된 지명 지세포와 조라포는 조선 수군이 이동한 경로를 특정해 줄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증병조참판정공전』은 녹도만호 정운 휘하 수군으로 복무한 흥양(지금의 전남 고흥군) 출신 오윤건이라는 인물의 경험담을 글로 옮긴 자료이다. 전라도 흥양 출신 오윤건이 경상도 거제에 속한 지명을 정확히 구술했다는 점은 조선 수군이 이곳을 거쳐간 사실을 거의 명확히 입증한다. 또한 그가 구술한 지세포와 조라포가 모두 경상우수영 진포라는 점은, 옥포해전 직전 조선 수군이 이동 과정에서 전술적으로 중요한 곳의 위치를 인지하면서 지나갔음을 방증한다.
『증병조참판정공전』에 나타난 옥포해전 직전 조선 수군의 이동 경로는 안방준의 「부산기사」에도 거의 똑같이 나타난다. 2019년에 열린 “제57회 거제옥포대첩 학술 세미나”에서 「부산기사」의 기록을 근거로 하여 남로설이 옳다는 주장이 제시되기도 하였다. 이 학술 세미나의 내용은 인터넷에서 쉽게 찾을 수 있으니, 관심 있으신 분은 세미나 제목으로 검색해 보시기 바란다.
사실 충무공의 장계 「옥포파왜병장」의 기록에도 남로설과 북로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단서가 존재한다. 아마 많은 학자들이 이를 간과하여 논쟁이 지금까지 지속된 것 같다. 위 「옥포파왜병장」의 기록을 살펴보면, 조선 수군은 천성과 가덕을 목적지로 삼고 이동하다가 옥포 앞바다에 이르러 옥포에 왜선이 정박해 있음을 파악하게 되었다. 천성과 가덕은 각각 지금의 부산 강서구 가덕도에 있던 경상우수영 소속 천성진과 가덕진을 말한다.
「옥포파왜병장」에 따르면, 옥포해전 직전 조선 수군은 왜선이 옥포에 정박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뒤 옥포로 이동한 것이 아니라, 천성과 가덕 방향으로 가다가 옥포 앞바다에 이르러 왜선이 옥포에 정박해 있다는 사실을 파악한 것이다. 즉, 옥포는 당시 조선 수군의 이동 경로 상에 있던 곳이다.

위 지도에 표시된 북로설 경로와 남로설 경로를 살펴보자. 만일 북로설 경로를 따라 조선 수군이 거제도 북쪽 바다를 거쳐 목적지인 천성과 가덕으로 나아가면, 그 이동 경로에서는 옥포 앞바다가 나오지 않는다. 거제도 북쪽 바다에서 옥포까지는 직선거리로 대략 15km가 넘는 먼 바닷길이며 거제도 북쪽 바다 주변에는 거제현의 영등포나 웅천현의 제포·안골포와 같은 포구가 있었다. 당시 영등포·제포·안골포는 모두 경상우수영 소속 진포였다. 즉, 북로설 경로를 따라가면, 그 이동 경로에서 영등포 앞바다 또는 제포 앞바다나 안골포 앞바다는 나올 수 있어도 옥포 앞바다는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북로설 경로는 「옥포파왜병장」의 기록과 서로 모순이 된다.
이에 비해 거제도 남쪽 바다를 통해 이동하는 남로설 경로를 따라 목적지인 천성과 가덕으로 나아가면, 그 이동 경로 상에서 옥포 앞바다를 만난다. 결론적으로 「옥포파왜병장」과 『증병조참판정공전』에 기록된 옥포해전 직전 조선 수군의 이동 경로는 서로 일치한다고 말할 수 있다.
(2) 옥포해전 전투 경과
이번에는 「옥포파왜병장」과 『증병조참판정공전』에 기록된 옥포해전의 전투 경과를 살펴보자. 「옥포파왜병장」과 『증병조참판정공전』에 기록된 옥포해전의 전투 경과를 서로 비교해보면 서로 일치하는 내용이 발견된다. 다음은 두 기록에서 서로 내용이 일치하는 부분을 각각 원 숫자와 밑줄로 표시한 것이다.
「옥포파왜병장」
①그 포(옥포) 바다 가운데로 정렬해 일제히 나아가니 왜선 30여 척(또는 50여 척)이 그 포(옥포) 선창에 나뉘어 정박해 있었습니다. 《중략》 ②적의 무리가 옥포에 들어가 약탈하여 연기가 산에 두루 퍼졌는데, 우리 군사의 배를 바라보더니 몹시 당황하여 각자 흩어져 배를 타고는 소리를 외치며 노를 재촉하여 가운데로 나오지 않고 연안을 따라 배를 몰았습니다. 6척이 선봉에 서서 달아나므로 《중략》 동서로 에워싸고 바람과 우레처럼 재빠르게 포와 활을 쏘자 적도 조총과 활을 쏘다가 그 힘이 다하여 그 배 안에 실었던 물건들을 바다로 던져버리느라 여념이 없었습니다. 화살에 맞은 자와 헤엄쳐 달아나는 자가 부지기수였고, ③한꺼번에 무너져 바위 언덕으로 기어올라 가면서 뒤처질까 두려워하는 듯하였습니다.
『증병조참판정공전』
①그러한 뒤에 배를 전진하여 양암(지금의 옥포만 양지암)의 해협으로 나가니 왜선 50여 척이 옥포에 정박하고 있다가 ②우리가 오는 것을 바라보고는 급히 돛을 올리고 나와 잇달아 동쪽으로 나아가 가덕도로 달아나려 하였다. 《중략》 이에 여러 배가 혹시 뒤처질까 두려워 함께 나아가 힘껏 싸우니 ③적이 배를 버리고 연안에 올라 달아났다.
①번은, 옥포에 있던 일본군이 외부로부터의 공격을 예측하지 못한 상황에서 조선 수군이 옥포로 기습해 들어갔다고 서술하였다. ②번은, 옥포에 정박해 있던 일본군이 기습해 들어오는 조선 수군을 보고는 맞서 싸우지 않고 서둘러 왜선을 타고 달아났다고 서술하였다. 예전에 어느 TV역사드라마에서 옥포해전 때 일본군이 조선 수군과 맞서 싸운 것처럼 묘사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 기록에 나타난 사실은 TV역사드라마의 묘사와 다르다. ③번은, 왜선을 타고 달아나던 일본군이 조선 수군의 공격으로 인해 배를 버리고 연안으로 달아났다고 서술하였다.
「옥포파왜병장」은 충무공이 작성한 기록이며, 『증병조참판정공전』은 수군 오윤건의 경험담을 글로 옮긴 기록이다. 즉, 두 기록은 서로 다른 출처를 가지고 있다. 출처가 서로 다른 사료에서 일치하는 기록이 발견되면, 역사학에서는 보통 이를 사실일 가능성이 높은 기록으로 판단한다. 「옥포파왜병장」과 『증병조참판정공전』 두 기록에 서술되어 있는 ①·②·③번 내용이 서로 일치하는 점은 이 두 기록의 신빙성을 “학술적”으로 입증한다.
참고로 「옥포파왜병장」은 충무공의 장계 사본인 『임진장초』, 『이충무공전서』, 『충민공계초』 등에 수록되어있다. 그런데 이들 사본에 수록된 각각의 「옥포파왜병장」에 나타난 왜선 숫자는 30척 또는 50척으로서 서로 다르다. 이는 현재 학계에서 명확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이다.
(3) 적진포해전 전투 경과
이번에는 「옥포파왜병장」과 『증병조참판정공전』에 기록된 적진포해전의 전투 경과를 살펴보자. 「옥포파왜병장」과 『증병조참판정공전』에 기록된 적진포해전의 전투 경과를 서로 비교해보면 여기에서도 서로 일치하는 내용이 발견된다. 다음은 두 기록에서 서로 내용이 일치하는 부분을 각각 원 숫자와 밑줄로 표시한 것이다.
「옥포파왜병장」
고성땅 적진포에 이르자 ①왜군의 대선과 중선 도합 13척이 해구에 죽 늘어서서 정박하고 있었는데, 왜인들이 포곶(浦串)의 여염집을 노략질한 뒤에 ②우리 군사들의 위세를 바라보고는 겁을 내어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낙안군수는 그 부 소속인 순천대장과 힘을 합해 왜대선 1척을, 《중략》 송한련이 1척을 모두 다 총통으로 쏘아 부수고 불태웠습니다.
『증병조참판정공전』
고성의 추원 적정포에 이르자 ①왜선이 포구에 늘어서 있었고, 여러 왜인이 바야흐로 고성에 들어가 인가를 약탈하고 있었으며, ②오직 배를 지키는 왜인만 있었으므로 마침내 그 배를 다 불태우니 모두 40여 척이었다.
①번은, 조선 수군이 적진포에 이르렀을 때 일본군은 왜선을 포구에 늘어서 정박해 놓고 인가를 약탈하고 있었다고 서술하였다. 단, 왜선이 정박한 장소는 각각 ‘적진포(赤珍浦)’와 ‘적정포(赤亭浦)’로 서로 다르게 표기하였다. ②번은, 조선 수군이 일본군의 저항을 받지 않고 정박해 있던 왜선을 불태웠다고 서술하였다. 단, 서술된 왜선의 총 규모는 각각 11척과 40여 척으로 서로 다르게 서술하였다.
『증병조참판정공전』에 기록된 ‘적정포’는 ‘적진포’와 구음이 상당히 비슷하므로 같은 지명임이 거의 틀림없다. 아마 오윤건이 적진포의 지명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해서 이렇게 기록된 듯하다. 위 두 기록에 나타난 왜선 규모가 서로 차이가 있는 점 또한 그가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일 수 있다. 현재 적진포는 그 지명의 위치가 정확히 밝혀져 있지 않은데, 최근 경남 고성군 거류면 화당리 화당 마을이 유력한 후보지로 주목받고 있다.
「옥포파왜병장」과 『증병조참판정공전』에 서술된 ①·②번 내용은 비록 전투 장소 표기와 왜선 규모에 차이가 있지만, 그 전투 경과는 대체로 일치한다. 앞에서 살펴본 옥포해전 기록과 마찬가지로 「옥포파왜병장」과 『증병조참판정공전』에 실린 적진포해전 기록 또한 ①·②번 내용이 일치하는 점을 통해 그 신빙성이 일부 입증된다.
- 본 글은 역사문화학회에서 출간된 『지방사와 지방문화』 제27권 2호(2024)에 수록된 논문 「『증병조참판정공전』의 임진왜란 초기해전 기록 고찰」의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된 글이다.
[윤헌식]
칼럼니스트
이순신전략연구소 선임연구원
저서 : 역사 자료로 보는 난중일기
이메일 : thehand8@hanmail.net
